2011년 03월 27일
은하영웅전설의 은하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가?
은하영웅전설 번역 일기 - 1. 여명편
은영전의 완역이라는 위업을 이루고 계신 Saga님의 블로그에서 역자님과 잠시 토론을 나눈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흘렀는데 다른 분의 리플이 달려서, 다른 분 블로그에서 리플에 리리플이 자꾸 길어지는게 보기 좋지 않을것 같아서 트랙백 하여 글을 새로 써 봅니다.
0.
경력을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지만 일단 번역밥 먹어본 입장에서 가상의 세계를 가정하는 극중에 등장하는 언어는 대부분 가상이며, 작가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역자는 함부로 현대, 혹은 근대 이전의 특정 언어임을 특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가령 극중에 나온 외국어 문장의 문법이 틀렸다면(아마 실제로는 작가의 지식적 한계가 원인이겠지만), 이는 작가의 지식과 무관하게 기획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그런 언어였다' 라는 식이지요.
물론 이는 이후 작가가 확실한 언급을 하고 정오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1.
우선 전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은 제국에서 사용되는 고유명사 등은 현대 독일어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루돌프 대제가 제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귀족계급에게 옛 게르만계 성씨를 하사한다는 말도 본문에 나옵니다. 뭐 일단 그냥 봐도 중학생 때 부터 '이건 독일식 독법을 상정했구나' 라는걸 알 수 있을정도였으니 뭐.
마인 카이저 등의 예 처럼 언어 사용 쪽에서도 단편적으로 이런 경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일본 문자의 표기 한계 때문에 von이 훤이 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개된 알파벳 표기법을 참고하거나 전례를 참고해서 '원래 무슨 소리를 표현하려고 했구나'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한국어나 일본어나 독어 발음의 정확한 표기는 불가능하죠;
(여담이지만 제가 외국어 공부하면서 가장 놀란건 ㅎ와 ㅋ의 경계가 모호한 언어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이었다능)
2.
그렇다고 이것이 은하제국이 독일어를 사용하는가? 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현대 독일어에 가까운 표기법과 독법을 가진 가상의 언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일단 '이제르론' 혹은 '이젤론' 요새에서 알 수 있듯, 엄밀히 따지면 독일어 독법을 완전히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확히는 문외한이 보기에 그럴듯 해 보이는 정도이고,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변태적인 집요함이 필수적인 소설이 아니라면 이정도로 충분합니다. 독일식 고유명사가 멋지다고 인식되기 때문인지(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함) 국내외의 환타지 소설 등에서 딱 이런 정도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작가의 언어적 지식 한계 때문인지 기획의도인지는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대 독일어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거죠. 일단 제국어를 '독일어와 유사한 독법과 표기법을 사용하는 가상의 언어'라고 가정하는 쪽이 보다 융통성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렇다면 (리플 달아주신 狂人Y君님 말씀대로)자유행성동맹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2에서 짚어본 '독일어식 표기, 독법을 사용하므로 은하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한다' 는 부분을 감안하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맹측 인명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기본적으로 영어식 표기를 기본으로 하되 인명을 따온 현대 언어들의 표기를 존중'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가령 동남아시아 계통 발음이나, 프랑스계 발음도 나오고 '아스타테' 같은 예도 있죠(이건 일단 그리스식 발음이라고 할수 있으려나).
한편으로 '비바 데모크라시'는 분명 영어식 표기죠.
(비바란 환호/외침은 이어 서어 불어 등등 안쓰는 나라가 없는듯 ㅎㅎ 단 데모크라시는 영어죠)
그럼 이걸 보고 '베트남어식 표기를 하니 베트남어를 씀' 혹은 '불어식 표기를 하니 불어를 씀' 이라고 할수는 없지 않느냐? 라는 것이 제 의견이고, 2에서 독일어 주장에 대해 제기한 제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대강 '유난히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존중적인 행태를 가졌지만 일단 영어에 가까운 가상의 언어' 정도로 가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광의로 보자면 오늘날의 다문화 다민족 국가를 모델로 삼았다고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4.
다음으로 '정황상 추리' 부분입니다. 뭐 이 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고 문화의 발전상이 현실과 유사하다는 가정하의 흥미위주 개드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은영전 작중 배경보다 약 500년 전, 말기의 은하 연방은 무슨 언어를 썼을 것인가?
체제는 완전히 바뀌었어도 영토와 국민이라는 측면에서 연방을 계승한 은하제국이 독일어를 쓴다고 가정한다면, 은하연방 역시 독일어, 혹은 그 모체가 되는 언어를 썼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류 통합 과정에서 모든 언어가 사라지고 순수한 독일어만 남게 되느냐 따위의 논의는 무의미하겠죠)
그러나 연방의 군인으로 등장하는 클레랑보 등의 인명을 보자면 이 역시 간단하게 동의할 수 있는 가정은 아닙니다. 다른 예가 좀 적긴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에서 나올 수 있는 이름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방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일단 공용어A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루돌프 대제가 연방 뒤엎고 제국 건국하면서 공용어A에서 현대 독일어로 언어를 바꾸었다? 이는 더더욱 무리가 가는 가정입니다. 원작에 보면 통화를 크레딧에서 마르크로 바꾸면서 도량형까지 바꾸려고 했으나 돈이 존내 든대서 포기했다...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언어를 갈아치우는 것은 도량형 변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단한 작업입니다. 게다가 그 바꾸는 언어가 현재 실사용자가 전혀 없는 언어라면 이는 불가능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렇게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공용어B라고 가정합니다. 공용어B는 극중의 주된 배경이 되는 우주력 800년 전후의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모태가 되는 언어임이 명백합니다.
한편 알레 하이네센이 이끄는 '구 제국민'들은 1만광년의 원정을 통해 동맹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 시점은 공용어B가 사용된지 약 150년 정도가 지난 시점(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입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고 문화권이 통일이 된 미래 인류지만 항상 변하는 것이 언어인 이상 공용어B 와도 상당히 다른 언어를 쓰고 있겠죠. 이 시점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공용어 C라고 가정합니다.
즉 이 공용어 C에서 처음으로 제국어와 동맹어의 분화가 발생합니다.
이후 양측이 조우하여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빠져들 때 까지 약 100년 이상의 문화적 단절기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약 150년의 전쟁(일종의 적극적 교류)과 망명자 유입 등으로 양측의 언어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극중 현재' 기준의 '제국어'와 '동맹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공용어A(은하연방어) -> 공용어B(초기 제국어) -> 공용어C(중기 제국어) -> 현 제국어
-> 현 동맹어
-> 현 페잔어?
거칠게 표현하면 대강 이런 표를 그릴 수 있지 싶습니다. 양측 언어의 분화는 대충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독일어로 발전하고 하나는 영어로 발전했다는 것은(2, 3에서 말한 예외 상황을 빼더라도) 작품 내적인 근거만 가지고 살펴보기에도 좀 억측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가의 다른 언급이 없다면 말이죠. 작가의 언급은 물론 절대 진리입니다. 언어발달사고 나발이고 작가는 신이므로 진화를 거꾸로 탈수도 있죠.
그러나 아마 현실 세계라면 심하면 좀 생소한 방언, 가볍다면 영국어와 미국어 정도의 차이를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지독일어 저지독일어의 분화는 길게 잡으면 약 1500년 가까이나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5.
그리고 다른 작품 내적인 근거를 좀 대자면, 극중에서 제국과 동맹이 명백하게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명백한 흔적은 찾기 힘듭니다.
우선 양이 사기쳐서 이제르론 요새 해먹을 때 공작원으로 들여보낸 쉔코프가 '유창한 제국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묘사는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제국어와 동맹어가 완전히 다르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로 치면 남파된 북한 공작원이 '문화어' 대신 '교양인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하는 것과 비슷할수도 있는거죠.
(남북의 언어는 시작이 다릅니다. 때문에 분단 후 불과 6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 차이가 상당하죠-교류가 없다는 점도 있지만-)
그러나 양이 포로수용소에서 제국군 포로들과 이야기 할 때나, 객장 메르카츠를 만날 때나, 황제를 접견할 때나, 이제르론 요새에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거나 할 때(+페잔 자치령에 율리안이 파견될 때) 딱히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외교상황이라면 통역의 존재가 전개상 생략되었을 수도 있지만, 포로들과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이고 황제를 만났던 것은 독대가 아니었던가요? 뭐 기계적인 통역기를 너도나도 가지고 다닐수도 있기야 하겠군요.
이런 측면에서 양측의 언어는(+페잔어도)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가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6.
제 생각에는, 은하연방에서 사용된 공용어는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현대의 여러 언어들의 영향이 절충된 가상의 언어이며(문자는 알파벳) 이를 기준으로 보면 제국어나 동맹어나 방언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제국은 '게르만 빠'인 루돌프 대제와 제국 황실의 영향도 있고 해서 독일어의 영향이 많이 갔고...
동맹은 초기 성립 과정에 제국 귀족들은 빠져 있으니 옛 연방의 다채로운 문화 영향이 병존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는 정도?
한가지 이상한 점은 루돌프 대제는 귀족 한정으로 옛 게르만계 성씨를 나누어 줬고 '구 제국민' 신분에서 도망쳐 동맹을 건국한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데, '극중 현실'을 사는 제국의 평민들이나(가령 볼프강 미터마이어) 망명자(가령 카스퍼 린츠)의 이름을 보면 이들 역시 독일계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뭐 주류 문화의 영향으로 이렇게 변했을 수도 있겠고 뭔가 직접적인 개명사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전부 대단한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합니다.
아마 진실은 작가가 제국을 조금 경직된, 게르만계 이름을 가진 백인 귀족들이 통치하는 전제주의 제국과 보다 자유롭고 다문화적 기풍을 가진 민주주의 동맹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부차적인 요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어적인 오류 부분은 작가의 기획의도라기 보다는 작가의 언어지식의 한계일테고, 거기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겠죠. 실제로 독자 입장에서 그 이미지는 충분히 전달이 되고 있으니까요.
리플에도 적었었지만 작가는 몽골계 조상을 가진 우람프가 전통적으로 성을 가지지 않은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몽골에서 성씨가 사라진 것은 공산주의 정권의 '일시적인' 방침에 불과하며, 전통적으로는 씨족명과 아버지 이름을 병기하는 등의 서명법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성씨 되찾기 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고요. 이들은 현실에 빗대자면 작가의 지식 한계가 가져온 가벼운 오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소설을 보는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은영전의 우주는 우리가 사는 우주와 전혀 다른 시공의 것이며 현실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은 전적인 우연이라고 해도 되니까요.
거기에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청각적인 이미지를 더해서 마치 제국은 독일어, 동맹은 영어를 쓰는 것처럼 포장해서 방영했을겁니다. 파렌하이트의 기함의 초강력 주포처럼 말이죠;
그런 만큼 '제국은 명백하게 독일어'를, '동맹은 명백하게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뛰어 넘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자 입장에서는 융통성 잃고 더욱 고민이 더해지는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제가 장황하게 적었듯이 제국에서 현대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근거는 작중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말 작가한테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ㅎㅎ)
8.
물론 극중 사용 언어에 대한 공식적인 어떤 코멘트가 이전이든 이후에든 있다면 본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지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오히려 시원해질것 같습니다 ㅎㅎ 일단은 번역계에 발가락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때문에 책 볼때 거기 계속 신경이 쓰이는 사람으로서 말이죠.
그리고 많은 부분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고려' 해 주시면서 번역을 하고 계시며 완성도 높은 은영전 완역본을 감상할 기회를 주시는 Saga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15년만의 새 판본을 보겠네요. 전 서울문화사 판은 조금 보다가 때려 치워서;
장르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한번 쯤 겪으셨겠지만 발번역 내지 분위기를 깨는 번역 때문에 괴로워 하신 기억이 있지 싶습니다. 은영전 완역본 출간이 다른 성의있는 장르 소설 번역본 출간의 신호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지금도 좋은 번역자분들은 많이 있지만요). 구체적으로는... 얼음과 불의 노래가 참;;; 일단 얼불노 5부는 신통찮은 번역본 기다리느니 나오자마자 원서 사서 읽기로 작정했답니다 ㅠㅠ
은영전의 완역이라는 위업을 이루고 계신 Saga님의 블로그에서 역자님과 잠시 토론을 나눈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흘렀는데 다른 분의 리플이 달려서, 다른 분 블로그에서 리플에 리리플이 자꾸 길어지는게 보기 좋지 않을것 같아서 트랙백 하여 글을 새로 써 봅니다.
0.
경력을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지만 일단 번역밥 먹어본 입장에서 가상의 세계를 가정하는 극중에 등장하는 언어는 대부분 가상이며, 작가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역자는 함부로 현대, 혹은 근대 이전의 특정 언어임을 특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가령 극중에 나온 외국어 문장의 문법이 틀렸다면(아마 실제로는 작가의 지식적 한계가 원인이겠지만), 이는 작가의 지식과 무관하게 기획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그런 언어였다' 라는 식이지요.
물론 이는 이후 작가가 확실한 언급을 하고 정오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1.
우선 전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은 제국에서 사용되는 고유명사 등은 현대 독일어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루돌프 대제가 제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귀족계급에게 옛 게르만계 성씨를 하사한다는 말도 본문에 나옵니다. 뭐 일단 그냥 봐도 중학생 때 부터 '이건 독일식 독법을 상정했구나' 라는걸 알 수 있을정도였으니 뭐.
마인 카이저 등의 예 처럼 언어 사용 쪽에서도 단편적으로 이런 경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일본 문자의 표기 한계 때문에 von이 훤이 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개된 알파벳 표기법을 참고하거나 전례를 참고해서 '원래 무슨 소리를 표현하려고 했구나'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한국어나 일본어나 독어 발음의 정확한 표기는 불가능하죠;
(여담이지만 제가 외국어 공부하면서 가장 놀란건 ㅎ와 ㅋ의 경계가 모호한 언어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이었다능)
2.
그렇다고 이것이 은하제국이 독일어를 사용하는가? 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현대 독일어에 가까운 표기법과 독법을 가진 가상의 언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일단 '이제르론' 혹은 '이젤론' 요새에서 알 수 있듯, 엄밀히 따지면 독일어 독법을 완전히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확히는 문외한이 보기에 그럴듯 해 보이는 정도이고,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변태적인 집요함이 필수적인 소설이 아니라면 이정도로 충분합니다. 독일식 고유명사가 멋지다고 인식되기 때문인지(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함) 국내외의 환타지 소설 등에서 딱 이런 정도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작가의 언어적 지식 한계 때문인지 기획의도인지는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대 독일어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거죠. 일단 제국어를 '독일어와 유사한 독법과 표기법을 사용하는 가상의 언어'라고 가정하는 쪽이 보다 융통성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렇다면 (리플 달아주신 狂人Y君님 말씀대로)자유행성동맹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2에서 짚어본 '독일어식 표기, 독법을 사용하므로 은하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한다' 는 부분을 감안하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맹측 인명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기본적으로 영어식 표기를 기본으로 하되 인명을 따온 현대 언어들의 표기를 존중'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가령 동남아시아 계통 발음이나, 프랑스계 발음도 나오고 '아스타테' 같은 예도 있죠(이건 일단 그리스식 발음이라고 할수 있으려나).
한편으로 '비바 데모크라시'는 분명 영어식 표기죠.
(비바란 환호/외침은 이어 서어 불어 등등 안쓰는 나라가 없는듯 ㅎㅎ 단 데모크라시는 영어죠)
그럼 이걸 보고 '베트남어식 표기를 하니 베트남어를 씀' 혹은 '불어식 표기를 하니 불어를 씀' 이라고 할수는 없지 않느냐? 라는 것이 제 의견이고, 2에서 독일어 주장에 대해 제기한 제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대강 '유난히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존중적인 행태를 가졌지만 일단 영어에 가까운 가상의 언어' 정도로 가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광의로 보자면 오늘날의 다문화 다민족 국가를 모델로 삼았다고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4.
다음으로 '정황상 추리' 부분입니다. 뭐 이 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고 문화의 발전상이 현실과 유사하다는 가정하의 흥미위주 개드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은영전 작중 배경보다 약 500년 전, 말기의 은하 연방은 무슨 언어를 썼을 것인가?
체제는 완전히 바뀌었어도 영토와 국민이라는 측면에서 연방을 계승한 은하제국이 독일어를 쓴다고 가정한다면, 은하연방 역시 독일어, 혹은 그 모체가 되는 언어를 썼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류 통합 과정에서 모든 언어가 사라지고 순수한 독일어만 남게 되느냐 따위의 논의는 무의미하겠죠)
그러나 연방의 군인으로 등장하는 클레랑보 등의 인명을 보자면 이 역시 간단하게 동의할 수 있는 가정은 아닙니다. 다른 예가 좀 적긴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에서 나올 수 있는 이름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방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일단 공용어A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루돌프 대제가 연방 뒤엎고 제국 건국하면서 공용어A에서 현대 독일어로 언어를 바꾸었다? 이는 더더욱 무리가 가는 가정입니다. 원작에 보면 통화를 크레딧에서 마르크로 바꾸면서 도량형까지 바꾸려고 했으나 돈이 존내 든대서 포기했다...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언어를 갈아치우는 것은 도량형 변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단한 작업입니다. 게다가 그 바꾸는 언어가 현재 실사용자가 전혀 없는 언어라면 이는 불가능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렇게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공용어B라고 가정합니다. 공용어B는 극중의 주된 배경이 되는 우주력 800년 전후의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모태가 되는 언어임이 명백합니다.
한편 알레 하이네센이 이끄는 '구 제국민'들은 1만광년의 원정을 통해 동맹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 시점은 공용어B가 사용된지 약 150년 정도가 지난 시점(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입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고 문화권이 통일이 된 미래 인류지만 항상 변하는 것이 언어인 이상 공용어B 와도 상당히 다른 언어를 쓰고 있겠죠. 이 시점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공용어 C라고 가정합니다.
즉 이 공용어 C에서 처음으로 제국어와 동맹어의 분화가 발생합니다.
이후 양측이 조우하여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빠져들 때 까지 약 100년 이상의 문화적 단절기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약 150년의 전쟁(일종의 적극적 교류)과 망명자 유입 등으로 양측의 언어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극중 현재' 기준의 '제국어'와 '동맹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공용어A(은하연방어) -> 공용어B(초기 제국어) -> 공용어C(중기 제국어) -> 현 제국어
-> 현 동맹어
-> 현 페잔어?
거칠게 표현하면 대강 이런 표를 그릴 수 있지 싶습니다. 양측 언어의 분화는 대충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독일어로 발전하고 하나는 영어로 발전했다는 것은(2, 3에서 말한 예외 상황을 빼더라도) 작품 내적인 근거만 가지고 살펴보기에도 좀 억측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가의 다른 언급이 없다면 말이죠. 작가의 언급은 물론 절대 진리입니다. 언어발달사고 나발이고 작가는 신이므로 진화를 거꾸로 탈수도 있죠.
그러나 아마 현실 세계라면 심하면 좀 생소한 방언, 가볍다면 영국어와 미국어 정도의 차이를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지독일어 저지독일어의 분화는 길게 잡으면 약 1500년 가까이나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5.
그리고 다른 작품 내적인 근거를 좀 대자면, 극중에서 제국과 동맹이 명백하게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명백한 흔적은 찾기 힘듭니다.
우선 양이 사기쳐서 이제르론 요새 해먹을 때 공작원으로 들여보낸 쉔코프가 '유창한 제국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묘사는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제국어와 동맹어가 완전히 다르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로 치면 남파된 북한 공작원이 '문화어' 대신 '교양인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하는 것과 비슷할수도 있는거죠.
(남북의 언어는 시작이 다릅니다. 때문에 분단 후 불과 6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 차이가 상당하죠-교류가 없다는 점도 있지만-)
그러나 양이 포로수용소에서 제국군 포로들과 이야기 할 때나, 객장 메르카츠를 만날 때나, 황제를 접견할 때나, 이제르론 요새에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거나 할 때(+페잔 자치령에 율리안이 파견될 때) 딱히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외교상황이라면 통역의 존재가 전개상 생략되었을 수도 있지만, 포로들과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이고 황제를 만났던 것은 독대가 아니었던가요? 뭐 기계적인 통역기를 너도나도 가지고 다닐수도 있기야 하겠군요.
이런 측면에서 양측의 언어는(+페잔어도)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가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6.
제 생각에는, 은하연방에서 사용된 공용어는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현대의 여러 언어들의 영향이 절충된 가상의 언어이며(문자는 알파벳) 이를 기준으로 보면 제국어나 동맹어나 방언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제국은 '게르만 빠'인 루돌프 대제와 제국 황실의 영향도 있고 해서 독일어의 영향이 많이 갔고...
동맹은 초기 성립 과정에 제국 귀족들은 빠져 있으니 옛 연방의 다채로운 문화 영향이 병존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는 정도?
한가지 이상한 점은 루돌프 대제는 귀족 한정으로 옛 게르만계 성씨를 나누어 줬고 '구 제국민' 신분에서 도망쳐 동맹을 건국한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데, '극중 현실'을 사는 제국의 평민들이나(가령 볼프강 미터마이어) 망명자(가령 카스퍼 린츠)의 이름을 보면 이들 역시 독일계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뭐 주류 문화의 영향으로 이렇게 변했을 수도 있겠고 뭔가 직접적인 개명사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전부 대단한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합니다.
아마 진실은 작가가 제국을 조금 경직된, 게르만계 이름을 가진 백인 귀족들이 통치하는 전제주의 제국과 보다 자유롭고 다문화적 기풍을 가진 민주주의 동맹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부차적인 요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어적인 오류 부분은 작가의 기획의도라기 보다는 작가의 언어지식의 한계일테고, 거기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겠죠. 실제로 독자 입장에서 그 이미지는 충분히 전달이 되고 있으니까요.
리플에도 적었었지만 작가는 몽골계 조상을 가진 우람프가 전통적으로 성을 가지지 않은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몽골에서 성씨가 사라진 것은 공산주의 정권의 '일시적인' 방침에 불과하며, 전통적으로는 씨족명과 아버지 이름을 병기하는 등의 서명법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성씨 되찾기 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고요. 이들은 현실에 빗대자면 작가의 지식 한계가 가져온 가벼운 오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소설을 보는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은영전의 우주는 우리가 사는 우주와 전혀 다른 시공의 것이며 현실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은 전적인 우연이라고 해도 되니까요.
거기에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청각적인 이미지를 더해서 마치 제국은 독일어, 동맹은 영어를 쓰는 것처럼 포장해서 방영했을겁니다. 파렌하이트의 기함의 초강력 주포처럼 말이죠;
그런 만큼 '제국은 명백하게 독일어'를, '동맹은 명백하게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뛰어 넘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자 입장에서는 융통성 잃고 더욱 고민이 더해지는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제가 장황하게 적었듯이 제국에서 현대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근거는 작중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말 작가한테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ㅎㅎ)
8.
물론 극중 사용 언어에 대한 공식적인 어떤 코멘트가 이전이든 이후에든 있다면 본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지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오히려 시원해질것 같습니다 ㅎㅎ 일단은 번역계에 발가락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때문에 책 볼때 거기 계속 신경이 쓰이는 사람으로서 말이죠.
그리고 많은 부분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고려' 해 주시면서 번역을 하고 계시며 완성도 높은 은영전 완역본을 감상할 기회를 주시는 Saga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15년만의 새 판본을 보겠네요. 전 서울문화사 판은 조금 보다가 때려 치워서;
장르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한번 쯤 겪으셨겠지만 발번역 내지 분위기를 깨는 번역 때문에 괴로워 하신 기억이 있지 싶습니다. 은영전 완역본 출간이 다른 성의있는 장르 소설 번역본 출간의 신호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지금도 좋은 번역자분들은 많이 있지만요). 구체적으로는... 얼음과 불의 노래가 참;;; 일단 얼불노 5부는 신통찮은 번역본 기다리느니 나오자마자 원서 사서 읽기로 작정했답니다 ㅠㅠ
# by | 2011/03/27 00:08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