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의 은하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가?

은하영웅전설 번역 일기 - 1. 여명편



은영전의 완역이라는 위업을 이루고 계신 Saga님의 블로그에서 역자님과 잠시 토론을 나눈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흘렀는데 다른 분의 리플이 달려서, 다른 분 블로그에서 리플에 리리플이 자꾸 길어지는게 보기 좋지 않을것 같아서 트랙백 하여 글을 새로 써 봅니다.




0.
경력을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지만 일단 번역밥 먹어본 입장에서 가상의 세계를 가정하는 극중에 등장하는 언어는 대부분 가상이며, 작가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역자는 함부로 현대, 혹은 근대 이전의 특정 언어임을 특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가령 극중에 나온 외국어 문장의 문법이 틀렸다면(아마 실제로는 작가의 지식적 한계가 원인이겠지만), 이는 작가의 지식과 무관하게 기획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그런 언어였다' 라는 식이지요.

물론 이는 이후 작가가 확실한 언급을 하고 정오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1.
우선 전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은 제국에서 사용되는 고유명사 등은 현대 독일어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루돌프 대제가 제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귀족계급에게 옛 게르만계 성씨를 하사한다는 말도 본문에 나옵니다. 뭐 일단 그냥 봐도 중학생 때 부터 '이건 독일식 독법을 상정했구나' 라는걸 알 수 있을정도였으니 뭐.

마인 카이저 등의 예 처럼 언어 사용 쪽에서도 단편적으로 이런 경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일본 문자의 표기 한계 때문에 von이 훤이 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공개된 알파벳 표기법을 참고하거나 전례를 참고해서 '원래 무슨 소리를 표현하려고 했구나'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지 한국어나 일본어나 독어 발음의 정확한 표기는 불가능하죠;
(여담이지만 제가 외국어 공부하면서 가장 놀란건 ㅎ와 ㅋ의 경계가 모호한 언어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이었다능)



2.
그렇다고 이것이 은하제국이 독일어를 사용하는가? 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현대 독일어에 가까운 표기법과 독법을 가진 가상의 언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일단 '이제르론' 혹은 '이젤론' 요새에서 알 수 있듯, 엄밀히 따지면 독일어 독법을 완전히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확히는 문외한이 보기에 그럴듯 해 보이는 정도이고,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변태적인 집요함이 필수적인 소설이 아니라면 이정도로 충분합니다. 독일식 고유명사가 멋지다고 인식되기 때문인지(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함) 국내외의 환타지 소설 등에서 딱 이런 정도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작가의 언어적 지식 한계 때문인지 기획의도인지는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대 독일어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거죠. 일단 제국어를 '독일어와 유사한 독법과 표기법을 사용하는 가상의 언어'라고 가정하는 쪽이 보다 융통성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렇다면 (리플 달아주신 狂人Y君님 말씀대로)자유행성동맹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2에서 짚어본 '독일어식 표기, 독법을 사용하므로 은하제국은 독일어를 사용한다' 는 부분을 감안하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맹측 인명들을 살펴보면 작가가 '기본적으로 영어식 표기를 기본으로 하되 인명을 따온 현대 언어들의 표기를 존중'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 가령 동남아시아 계통 발음이나, 프랑스계 발음도 나오고 '아스타테' 같은 예도 있죠(이건 일단 그리스식 발음이라고 할수 있으려나).

한편으로 '비바 데모크라시'는 분명 영어식 표기죠.
(비바란 환호/외침은 이어 서어 불어 등등 안쓰는 나라가 없는듯 ㅎㅎ 단 데모크라시는 영어죠)

그럼 이걸 보고 '베트남어식 표기를 하니 베트남어를 씀' 혹은 '불어식 표기를 하니 불어를 씀' 이라고 할수는 없지 않느냐? 라는 것이 제 의견이고, 2에서 독일어 주장에 대해 제기한 제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대강 '유난히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존중적인 행태를 가졌지만 일단 영어에 가까운 가상의 언어' 정도로 가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광의로 보자면 오늘날의 다문화 다민족 국가를 모델로 삼았다고 해도 좋을것 같습니다.



4.
다음으로 '정황상 추리' 부분입니다. 뭐 이 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고 문화의 발전상이 현실과 유사하다는 가정하의 흥미위주 개드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은영전 작중 배경보다 약 500년 전, 말기의 은하 연방은 무슨 언어를 썼을 것인가?

체제는 완전히 바뀌었어도 영토와 국민이라는 측면에서 연방을 계승한 은하제국이 독일어를 쓴다고 가정한다면, 은하연방 역시 독일어, 혹은 그 모체가 되는 언어를 썼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류 통합 과정에서 모든 언어가 사라지고 순수한 독일어만 남게 되느냐 따위의 논의는 무의미하겠죠)

그러나 연방의 군인으로 등장하는 클레랑보 등의 인명을 보자면 이 역시 간단하게 동의할 수 있는 가정은 아닙니다. 다른 예가 좀 적긴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에서 나올 수 있는 이름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방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일단 공용어A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루돌프 대제가 연방 뒤엎고 제국 건국하면서 공용어A에서 현대 독일어로 언어를 바꾸었다? 이는 더더욱 무리가 가는 가정입니다. 원작에 보면 통화를 크레딧에서 마르크로 바꾸면서 도량형까지 바꾸려고 했으나 돈이 존내 든대서 포기했다...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언어를 갈아치우는 것은 도량형 변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단한 작업입니다. 게다가 그 바꾸는 언어가 현재 실사용자가 전혀 없는 언어라면 이는 불가능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렇게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공용어B라고 가정합니다. 공용어B는 극중의 주된 배경이 되는 우주력 800년 전후의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모태가 되는 언어임이 명백합니다.

한편 알레 하이네센이 이끄는 '구 제국민'들은 1만광년의 원정을 통해 동맹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 시점은 공용어B가 사용된지 약 150년 정도가 지난 시점(맞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입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고 문화권이 통일이 된 미래 인류지만 항상 변하는 것이 언어인 이상 공용어B 와도 상당히 다른 언어를 쓰고 있겠죠. 이 시점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공용어 C라고 가정합니다.

즉 이 공용어 C에서 처음으로 제국어와 동맹어의 분화가 발생합니다.

이후 양측이 조우하여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빠져들 때 까지 약 100년 이상의 문화적 단절기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약 150년의 전쟁(일종의 적극적 교류)과 망명자 유입 등으로 양측의 언어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극중 현재' 기준의 '제국어'와 '동맹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공용어A(은하연방어) -> 공용어B(초기 제국어) -> 공용어C(중기 제국어) -> 현 제국어
                                                                                         -> 현 동맹어
                                                                                                                -> 현 페잔어?


거칠게 표현하면 대강 이런 표를 그릴 수 있지 싶습니다. 양측 언어의 분화는 대충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는 독일어로 발전하고 하나는 영어로 발전했다는 것은(2, 3에서 말한 예외 상황을 빼더라도) 작품 내적인 근거만 가지고 살펴보기에도 좀 억측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가의 다른 언급이 없다면 말이죠. 작가의 언급은 물론 절대 진리입니다. 언어발달사고 나발이고 작가는 신이므로 진화를 거꾸로 탈수도 있죠.

그러나 아마 현실 세계라면 심하면 좀 생소한 방언, 가볍다면 영국어와 미국어 정도의 차이를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지독일어 저지독일어의 분화는 길게 잡으면 약 1500년 가까이나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5.
그리고 다른 작품 내적인 근거를 좀 대자면, 극중에서 제국과 동맹이 명백하게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명백한 흔적은 찾기 힘듭니다.

우선 양이 사기쳐서 이제르론 요새 해먹을 때 공작원으로 들여보낸 쉔코프가 '유창한 제국 표준어'를 사용한다는 묘사는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제국어와 동맹어가 완전히 다르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로 치면 남파된 북한 공작원이 '문화어' 대신 '교양인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하는 것과 비슷할수도 있는거죠.
(남북의 언어는 시작이 다릅니다. 때문에 분단 후 불과 6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 차이가 상당하죠-교류가 없다는 점도 있지만-)

그러나 양이 포로수용소에서 제국군 포로들과 이야기 할 때나, 객장 메르카츠를 만날 때나, 황제를 접견할 때나, 이제르론 요새에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거나 할 때(+페잔 자치령에 율리안이 파견될 때) 딱히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외교상황이라면 통역의 존재가 전개상 생략되었을 수도 있지만, 포로들과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이고 황제를 만났던 것은 독대가 아니었던가요? 뭐 기계적인 통역기를 너도나도 가지고 다닐수도 있기야 하겠군요.

이런 측면에서 양측의 언어는(+페잔어도)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가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6.
제 생각에는, 은하연방에서 사용된 공용어는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현대의 여러 언어들의 영향이 절충된 가상의 언어이며(문자는 알파벳) 이를 기준으로 보면 제국어나 동맹어나 방언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제국은 '게르만 빠'인 루돌프 대제와 제국 황실의 영향도 있고 해서 독일어의 영향이 많이 갔고...

동맹은 초기 성립 과정에 제국 귀족들은 빠져 있으니 옛 연방의 다채로운 문화 영향이 병존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는 정도?

한가지 이상한 점은 루돌프 대제는 귀족 한정으로 옛 게르만계 성씨를 나누어 줬고 '구 제국민' 신분에서 도망쳐 동맹을 건국한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데, '극중 현실'을 사는 제국의 평민들이나(가령 볼프강 미터마이어) 망명자(가령 카스퍼 린츠)의 이름을 보면 이들 역시 독일계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뭐 주류 문화의 영향으로 이렇게 변했을 수도 있겠고 뭔가 직접적인 개명사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전부 대단한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합니다.

아마 진실은 작가가 제국을 조금 경직된, 게르만계 이름을 가진 백인 귀족들이 통치하는 전제주의 제국과 보다 자유롭고 다문화적 기풍을 가진 민주주의 동맹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부차적인 요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어적인 오류 부분은 작가의 기획의도라기 보다는 작가의 언어지식의 한계일테고, 거기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겠죠. 실제로 독자 입장에서 그 이미지는 충분히 전달이 되고 있으니까요.

리플에도 적었었지만 작가는 몽골계 조상을 가진 우람프가 전통적으로 성을 가지지 않은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몽골에서 성씨가 사라진 것은 공산주의 정권의 '일시적인' 방침에 불과하며, 전통적으로는 씨족명과 아버지 이름을 병기하는 등의 서명법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성씨 되찾기 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고요. 이들은 현실에 빗대자면 작가의 지식 한계가 가져온 가벼운 오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소설을 보는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은영전의 우주는 우리가 사는 우주와 전혀 다른 시공의 것이며 현실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은 전적인 우연이라고 해도 되니까요.

거기에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청각적인 이미지를 더해서 마치 제국은 독일어, 동맹은 영어를 쓰는 것처럼 포장해서 방영했을겁니다. 파렌하이트의 기함의 초강력 주포처럼 말이죠;

그런 만큼 '제국은 명백하게 독일어'를, '동맹은 명백하게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뛰어 넘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자 입장에서는 융통성 잃고 더욱 고민이 더해지는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어쨌든 제가 장황하게 적었듯이 제국에서 현대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근거는 작중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말 작가한테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ㅎㅎ)




8.
물론 극중 사용 언어에 대한 공식적인 어떤 코멘트가 이전이든 이후에든 있다면 본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지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오히려 시원해질것 같습니다 ㅎㅎ 일단은 번역계에 발가락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때문에 책 볼때 거기 계속 신경이 쓰이는 사람으로서 말이죠.

그리고 많은 부분 기억에 의존해 기록한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고려' 해 주시면서 번역을 하고 계시며 완성도 높은 은영전 완역본을 감상할 기회를 주시는 Saga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15년만의 새 판본을 보겠네요. 전 서울문화사 판은 조금 보다가 때려 치워서;

장르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한번 쯤 겪으셨겠지만 발번역 내지 분위기를 깨는 번역 때문에 괴로워 하신 기억이 있지 싶습니다. 은영전 완역본 출간이 다른 성의있는 장르 소설 번역본 출간의 신호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지금도 좋은 번역자분들은 많이 있지만요). 구체적으로는... 얼음과 불의 노래가 참;;; 일단 얼불노 5부는 신통찮은 번역본 기다리느니 나오자마자 원서 사서 읽기로 작정했답니다 ㅠㅠ


by 금린어 | 2011/03/27 00:08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12)

제주도 왕국

개인적으로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교과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역사는 상호간의 이해관계와 한강유역 공방이 주가 되고 다른 부분들은 일부러 찾아야지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삼국 외의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그나마 고구려의 대수 대당 전쟁은 간판급 대우를 받긴 합니다만 역사서에도 상당히 자주 나오는 '왜'의 존재와 영향력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그나마 한반도 왜 등 요즘들어 국내에서도 자꾸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논문 찾아보는 수준이 되어야지, 교양서적 수준에서 접근성은 무척 떨어집니다).

한편 가야 같은 경우 '편의상 생략'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일반인의 인식은 '존만한 나라가 백제-신라 국경 사이에서 깝치다 망ㅋ함ㅋ'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래도 최근들어 연구자들도 많이 늘어나고 일반 대중용 서적들도 많이 나와서 관심이 있으면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 되긴 했지만요.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에 있었단 마변진 삼한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 역시 '삼국시대 이전의 빈칸채우기' 정도의 비중입니다. 심지어 마한=고구려, 진한=신라, 변한=백제라는 아주 편리한 역사관을 가진 분도 봤습니다. 그러니 이 고대 소국 연합체의 운명에 관해서는 알고싶어도 자료를 찾기 어려운게 현실이죠. 저도 고등학교 졸업 기준으로 삼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삼한중 철본좌는? 변한=철은 변한다'의 수능용 암기가 전부였음. 뭐 다행히 최근에는 백제가 미처 장악하지 못한 영산강 유역의 옛 마한의 잔여 세력이나 진한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서 등은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런데 한반도 본토의 지역사가 이런 취급을 받는 상황이니 제주도는 항상 아오안이죠 ㅠㅠ




제주도는 국사에서 참 특수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당히 큰 섬이고 외세의 영향 없이 독자적인 국가로 존재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강성하여 본토의 국가들의 영향을 거부한게 아니라 그냥 잊혀진;;; 것일 가능성이 크죠. 백제나 신라나 고려나 연락이 두절되다가도 바로바로 복속하는것을 보면 말입니다.

보통 탐라라고 알려진 제주도, 혹은 제주도 정치세력의 이름은 탐모라 탐진 탁라 동영주 도이 주호 등등 종류가 많다고 합니다. 즉 예전부터 주변국가들에게 알려지긴 했던것 같고(보통 저런 이름들은 자칭보다 타칭일 가능성이 높죠) 나름의 교류가 있었던것 같기는 한데 관련 자료는 상당히 빈약합니다. 고대사 연구에서 국서교환 기록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기록이 풍부한 편은 아닙니다. 다만 신라, 백제, 당 등에 단속적인 사신 방문이 있어 대략적인 당시 제주도의 사회문화적인 분위기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백제-신라의 패권 변화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작년에는 TV 다큐멘터리에서 '고대해상왕국'이라 칭하며 독립왕국으로서의 탐라를 재조명하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오수전이 출토되어 고대해상교역의 한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노무 오수전이 하필 왕망전이라, 정통성 확보를 위해 변경국가와의 책봉관계에 집착하던 왕망정권의 일시적인 외교사절이 가져온 선물이라는 설도 있긴 합니다. 뭐 인터넷에서 보니 왕망이 김일제의 후손이며 제주도 오수전은 몰락한 왕망 일가가 제주도로 피난오면서 가져온것이다... 라는 이야기도...)

여러 주변국들의 기록들, 즉 국서나 교역기록, 전쟁기록(백강전투에 탐진이 참전?) 등과 발굴 성과를 미루어 보면 고대 탐라국이 '생각보다는' 영향력 있는 독립 세력으로서 존재했다는 점을 일단 알수는 있습니다. 당회요에 따르면 7세기 제주도 인구가 8천호라고 합니다. 현대 제주도 인구가 55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은 인구라고 할 수는 없네요. 발굴조사에 따르면 기원전후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 급격한 인구증가의 흔적이 보인다니 고대일본의 인구 유입과도 연관해서 연구를 해 볼수 있을것 같기도 합니다만 역시 기록의 부재가 ㅠㅠ

한편 유물로 넘어가면 제주도는 진짜 신기한 유물유적이 많습니다.

150여기의 고인돌, 유일의 해중 고인돌.
(저는 항상 제주 뿐 아니라 한반도의 고인돌 건설자들의 의의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기록이 없다는게 가장 크지만요)
위에 말한 오수전.
딱 한곳 발굴된 옹관묘.
대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돌하르방(이스터섬 모아이와의 연관설이... ㅋㅋ)
제주도 토기(독자적인 발전양상과 원인모를 토기 집락군등)

등등이 있고, 전통문화적 측면으로 봐도 한반도 본토와는 너무도 다른 여러 문화적 요소가 '다른 나라는 다른 나라였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 삼성혈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가 땅에서 솟아나와 가죽옷과 활로 무장하고(명궁이야기는 빠지질 않음) 탐라국을 열었다, 라는 독자적인 개국신화입니다. 그리고 삼별초 항쟁의 경우도 제주도 토착 설화중에 삼별초를 존내 나쁜놈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국사에서의 왕조, 혹은 민족 본위적인 서술이 가지는 문제점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한반도 삼국정립의 과정에 사라져간 수많은 소국들의 운명이 그러했듯, 스스로 편찬한 사서가 남아있지 않은 고대국가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제주도 같은 경우 딱히 외세의 침입도 없이 오롯하게 사실상 독립국으로 고려시대 중기까지 이어져 온 만큼 더욱 안타깝습니다. 


대체 제주도에는 오키나와 삼국시대나 하와이의 패왕 카메하메하와 같은 재미난 무언가가 왜 없는거야!


그러나 제주도에 집중된 고고학적, 역사학적 노력이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만큼 부족하기 때문에 장차 상황이 나아지길 바랄 수는 있겠습니다. 사실 고대 일본의 경우도 자체 사서가 없지만 한서의 국서 기록과 발굴성과를 토대로 고대국가 형성 무렵을 복원하고 있죠. 물론 일본은 한서의 기록과 연관되는 금인이라는 먼치킨급 대박 아이템이 '우연히' 발굴되었다는 엄청난 행운도 있긴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오랜 발굴과 조사가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주도의 발굴성과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단편적으로, 각 성과에 대해서는 나름 상세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만 그러한 성과들을 연결하여 제주도의 고대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제 노력이 부족해서 못 찾은 것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어떤 주장을 해도 충분한 관련자료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에 모험적인 연구를 시도하는 학자가 없는게 아닌가 싶네요.



라고 생각했는데,




탐라국에는 관찬사서는 없지만, 제주 고씨 가문의 독자적인 기록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다는 제주도 출신 친구의 말을 듣고 인터넷으로 제주도 신문들을 포풍검색했습니다. 그 결과 상당히 자세한 내용들이 인용되는 것을 보고 완전 흥분했습니다. 항가항가 하면서 완전 들뜬 상태로 마우스를 클릭클릭 했죠.

이 분이 탐라국 시조 고을나 王 이라고 합니다. 오오~

이 때 모 네이버 카페에서 제주도에는 사서가 없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 '탐라국 사서가 왜 없냐'며 일갈하는 분을 발견하고 쪽지로 대화를 나누어 귀중한 정보를 얻습니다.

문제의 기록의 제목은 제목이 무려 王世記 라고 합니다. 시조 고을나에서 45대에 걸친 가문의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얻게 된 문제의 왕 리스트.


오오 탐라국은 기원전 2337년에 건국되어 초대 고을나왕의 치세는 무려 131년!  2대 고건왕의 치세는 무려 430년!





이게 뭬야!









아아아 ㅠㅠ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이거 글자 그대로 믿는 분들도 꽤 많으시더군요.

그냥 이런 책도 있더라는 겁니다.


by 금린어 | 2011/03/19 19:32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2)

환타지 세계의 왜곡된 오리엔탈리즘

나르니아 연대기의 칼로르멘과 타문화비하에 관하여.



0. 서문

원문에 나타난 것과 같은 문화적 현상, 혹은 문제를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이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경우는, 대체로 이것이 주로 동양권을 모티프로 한 배경이 타문화권에 대한 상대적 비하의 양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겁니다.  특히 서양인이 서술한 소설의 경우 굳이 장르소설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은 동양문화에 대해 지독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참 많죠. 굳이 제목을 '왜곡된 오리엔탈리즘' 이라고 달았지만 실제로는 아시아 이외에도 아프리카나 신대륙의 문화, 또 유럽 내에서도 비 주류 문화권에 대한 어떤 형태의 비하나 왜곡이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서술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1. 구미인이 가진 선입견의 원인과 역사

인간은 참 구실을 좋아하는 동물인지라, 근세 이후로 '비 문명국'을 침탈하기 위해 서구 각국은 여러가지 논리를 개발해냅니다. 그 '구실'들이 타문명에 대한 왜곡과 비하였는데요, 대충 정리해보면, 

'피부가 누런 동양인들은 병맛쩌는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냅두면 평생 2천년 전과 다름없는 미신가득한 삶을 살게 뻔하므로 우리가 좀 도와줘야겠다. 이슬람 이생키들은 비잔티움이나 멸망시키고 찬란한 문화의 파괴집단이다 개늠들 우리 조교가 필요하다. 신대륙 인디언들은 여직 석기시대 문화에 사람도 잡아먹더라 ㅉㅉ. 아프리카 흑인들은 쟤들이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그쩌네효'

뭐 이런 이미지를 덧씌운거죠. 소설로 재구성된 바야돌리드 논쟁을 보면 '괴짜 수도사'가 '남미 원주민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상대측인 상인이자 법률가는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를 하나하나 제시합니다. 그리고 심판관인 추기경이 내린 결론을 보면 '남미 원주민들은 그만 괴롭히고 훨씬 덜 인간같은 아프리카 흑인들 갈궈라'죠.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굳이 이미지를 만들고 말고 할것도 없이 이미 유럽인들은 이런 종류의 생각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도 이야기가 되는 특이한 문화와 인종의 이야기들이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었겠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경우, 그 이전에도 유럽~중국 루트를 전부 오가는 상인들이 없었을 뿐이지 중앙 아시아 쪽 까지는 유럽 상인들도 상당히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동방 여행에 대한 가이드북 까지 나온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이드북에 따르면 동방행은 모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냥 좀 준비가 필요한 인구밀도 적은 지역 여행에 불과했던 것이죠. 당연히 전혀 이야기가 되지 못했고, 몬스터 등장 빈도 관리 잘못한 옛 일본 RPG게임마냥 매 장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쏟아지는 마르코 폴로의 과장된 여행기가 대중에게 '상식'으로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상식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므로, 이런 부분이 훨씬 덜 예민한 시절에 인격이 형성된 작가나, 쓰여진 작품들의 경우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담으로 일본학자들이 탈아입구를 부르짖으며 만들어낸 역사적 장치가 '봉건 중세설' 입니다. 유럽을 제외한 세계 전역의 모든 문명들은 봉건사회로 대표되는 중세시대를 거치지 못해 현대 문명 진입이 불가능한데, 오로지 일본만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진입한 단계이므로 현대적 문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할수가 있다는 궤변 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은 시스템 측면으로 보면 진시황부터 근세고, 인간과 지역에 기반한 할거라는 측면에서 보면 남북조 시대부터 근세겠죠 ㅋㅋ



2. 그 결과와 현재

오늘날 환타지의 원류라고 볼 수 있는 LOTR의 경우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라드림, 이스터링, 칸디쉬 등등등. 톨킨의 저작과 기타 여러 자료들을 읽다 보면 이 '동역인' 들은 '서역인'과 대비되어 사악하고 비문명화된 존재들로 나옵니다. 하지만 톨킨의 소설이나 실마릴리온, 그리고 HoME등의 자료들을 보다보면 톨킨이 진짜 명확하게 '이슬람과 그 이동의 주민'들을 묘사하고자 했는지는 의문이 가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톨킨은 모티브를 던졌을 뿐인데, 톨킨 이상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그러한 이미지를 덧 씌워 버린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죠.

실제로 '공식' 영화와 게임에서 조형화 된 하라드 올리판트나 이스터링 카타프락트 같은 존재들을 보자면 아랍인이나 스텝인들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하고 있는데, 톨킨이 상상했던 이미지와 얼마나 비슷할까?라는 의문은 가질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오래된 미니어쳐 전술게임인 '워해머 환타지 배틀'의 경우, 실제로 게임에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현실세계와 매칭하여 세계 전역을 구상해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독일 - 제국. 인간들의 국가로 주인공격, 초대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광신적 성향.
프랑스 - 브레토니아. 기사도 빠돌이 국가. 위치나 언어상 프랑스지만 아서왕 등 영국과도 컨셉 많이 겹침. 각 캐릭터들이 기사도 이미지의 전형적 인물들임. 그린나이트, 잔다르크, 엘 시드, 음유시인, 사자왕 등등등.
이탈리아 - 틸레아. 항쟁중인 도시국가들.
스페인 - 에스탈리아. 그냥 위치랑 애들 옷 해입는게 비슷.
러시아 - 키슬레프. 정확히는 근대 이전 동구권 전체. 특히 폴란드.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이집트 - 켐리. 미라가 된 옛 왕들과 근위병들이 여차저차 되살아나서 난리남. 네크로맨시의 성지.
이슬람세력 - 아라비. 저 위의 4 국가와 십자군 전쟁도 치르고 잘 나가다가 켐리 잘못 건드려서 망함. 지금 죄다 유목민(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있음)
중앙아시아 산악지대 - 오거 킹덤. 통일되지 않고 지들끼리 존내 싸우고 잡아먹음. 외부에 용병활동.
이란 등 - 카오스 드워프. 매드 사이언티스트.
스텝 지역 - 홉고블린. 늑대 타고 다니는 궁기병. 저 위에 키슬레프랑 사이 안좋음.
북미 - 다크엘프. 살륙과 고문에 미친 또라이들.
중남미 - 리저드맨. 도마뱀. 근데 문명의 시초이자 절대악에 맞서는 절대선의 이미지.

뭐 이런걸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의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허나...

스칸디나비아 - 노스카. 바이킹 비슷한 애들 살았는데 카오스 게이트에 너무 가까워서 다들 악당화. 롱쉽타고 신대륙 탐험도 하고 그럼.
루마니아 - 실바니아. 뱀파이어 소굴. 인간들도 살고 제국 땅인데 세금이나 제때 걷어가나 모르겠음.
영국 - 알비온. 안개로 뒤덮인 환상의 섬. 영적인 존재들이 사는데 지들기리 싸우다 안되니 외세 끌어들여 싸우고 난리.

이런 식으로 유럽 문화권도 썩 좋은 쪽으로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편 중국의 경우는...

중국 - 카타이. 용이 통치하며, 국경을 '장성'으로 막고 있음. 화약 일찍 발명. 전국민이 소림사 문하생?!

비교적 온건?하게 이미지의 편린만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의 경우도 문화에 대한 비하나 왜곡을 말한다면 빠지지 않습니다. 특이하게 일본은 중세 이전의 자국을 환타지화 시키거나 환타지 세계에 재구성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그럴때 발전된 문물에 이상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상향처럼 그려지는 경우도 있고, 저런데서 어찌 사나 싶을 정도로 생지옥인 요괴 소굴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죠.

아무튼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에서 독보적으로 볼 수 있는게 바로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쿠샨입니다. 쿠샨의 복식이나 무장등은 대충 투르크나 북인도의 것을 많이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작가가 참고한 자료집이 그쪽에 관한 자료였겠죠. 어쨌든 뭐 만화책 보신 분은 아실테고 안 보신 분은 네타가 될지도 모르니 설명은 생략합니다만, 이건 인외마경이 따로 없죠. 이를 '동양인(오리엔트... 죠)이 오리엔탈리즘 왜곡에 빠지면 더 심하다' 고 받아들이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영화 300의 페르시아군 왜곡 문제와 맞물려서 한참 이야기된 적이 있었죠.



3. 과연 그런가

굉장히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장르 소설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직접 자작에 도전하시거나(그 결과로 출판을 하셨거나), 하다못해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공상의 나래를 펼쳐보신 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드래곤 라자로 국내 환타지계에 새 장을 열었던 이영도 작가를 추종하는 원리주의자들 중에는 '세계관 무용론'을 외치는 또라이들이 있긴 합니다만, 실제로는 이영도 작가 본인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세계관이 튼실하지 않은 소설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글 쓰기에 앞서 대충이라도 가상의 세계를 구성해본 분들은 한번 쯤 겪어보셨겠지만...

기존의 자신이 가진 지식의 틀을 새로운 세계에 덧씌우게 됩니다.

이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환타지든 SF든, 뭐 사이버펑크니 스팀펑크든 어떤 종류의 가상세계도 현실세계에서 완전히 유리되지는 못합니다.

"아 내가 소설 쓰다가 2권 분량부터 좀 다른 세력이 등장해야돼. 일단 얘들은 서로 다른 종교를 믿도록 하자고. 그리고 특이하게 만곡도 들어주고, 좀 헐렁한 옷도 입어보자고. 어라 이거? 이... 이거... 이... 흐끄루허마ㅣ어리ㅓㅣㅓㄱ"

뭐 이렇게 된다는 것이죠. 상상력의 한계에 봉착하지 못한 작가는 없다라는 것일까요 ㅎㅎ 뭐 SF물에 나오는 외계인들의 경우도 어째 외우주에서 왔다는 놈들이 중국인 이미지 차용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좀 너무 나이브하게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구성과 왜곡의 차이는 악의와 목적성의 유무에 있다? 정도가 제 생각입니다.

역으로 비하는 아니지만 왜곡은 마찬가지인 경우를 들자면 양키 환타지에 등장하는 '사무라이'가 있겠습니다. 미국인들이 '일본인'은 싫어해도 '사무라이'는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라멜라 아머를 입고 외날검을 든 무사'이미지는 정말 여러가지 측면에서 서구인들이 창조한 세계에 등장합니다. 20년 전에 만들어진 RPG게임에도 당당하게 직업으로서 사무라이가 등장하니 말 다했죠. 이 역시, 특정 방면으로 강화된 이미지와 뒷받침 안되는 무지에서 발생한 왜곡의 한 종류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책

그런데 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미지의 차용이 특정 다수를 불쾌하게 만들고 왜곡된 오리엔탈리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한다면 이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최근에 만들어진 훌륭한 가상세계중 하나인 '매직 더 게더링'의 세계의 경우 '미라지' 세트의 배경이 되던 세계가 있습니다. 삽화나 생활양식이나 명백하게 중동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신비롭고 특별한 이미지를 혼용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당연히 하얀 피부의 금발로 표현되곤 했던 '천사'가 하얀 날개를 달긴 했지만 건강미 넘치는 흑인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매직 더 게더링에서는 나중에 카미카와에서 일본풍의 세계를 그리기도 했지요(평은 별로).

국내 정식출간된 TRPG 룰북인 겁스의 서플먼트 중에 '환타지'를 보면 실제 지구의 주민들이 가상의 지구로 워프해 가서 새로운 세상에 적응했다. 그러므로 종교나 생활습관등은 중세 지구와 비슷하다 라는 설정을 베이스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를 대놓고 활용해서 '상식에 가까운' 세계를 표방하고 있죠. 그런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역시 유럽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국인이 소설에서 미국 사회를 그려봤자 등장인물들은 미국인의 탈을 쓴 한국인이다, 란 이야기가 있는데,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것이죠.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작가가 전지전능하지 않고서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때 기존의 지식에 의거해 어떤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고... 또한 왜곡이나 비하는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악의를 가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많이 해소되... 려나?

그런데 아무리 흔적을 줄이려고 애써도, 자료를 수집하고 고심해도 한계가 있으며, 나쁜 쪽으로 보면 컨셉 잡고 까려고 들면 절대 피할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LOTR의 경우 오늘날 약간의 인종차별 이야기가 나오는 정도지만, 한 때 본격적으로 '반공투사 톨킨'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뭐 지도가 비슷하다, 동쪽에서 몰려오면서 서역 곳곳에 그 지부를 둔다, 이런걸 근거로 끼워맞추기를 한건데요 톨킨 본인의 생각은 둘째치고 이런 식으로 짜맞추지 못할 소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래서 창작물에 대한 검열이 무섭기도 하고요.

이야기가 자꾸 엇나가네요. 대충 결론을 짓자면, 가상세계의 조직은 작가의 지식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평하는 독자의 지식의 한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이 보이기도 하죠.




5. 본문과 크게 관계없는 사담

제가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크게 할 말이 없습니다만, 르 귄 역시 비슷한 공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허나 르 귄의 여러 글들에서 느껴지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애정?을 생각해 보면 정말 르 귄 여사가 인종적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를 썼을까? 싶었지요.

에... 두서 없는 글이 길어졌군요. 저는 최근에 전공을 살려서 이러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적 요소들을 끌어모아 하나의 가상 문화권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러한 글이 올라왔길래 오리엔탈리즘과 관련하여 글을 쓰게 되었네요. 막연하게 동양적인 이미지는 주면서, 구체적인 면은 최대한 배제한 그런 세계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까먹고 안 썼는데, 이러한 서구적인 환타지에 대한 반발로 반짝 했던 '동양적 환타지'가 지지부진 했던 이유는 역시 이렇다 할 이미지와 컨텐츠가 부족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역으로 서구 환타지에 이미지만 너무 대놓고 억지로 가져다 씌워서 제대로 공감이 가는 세계를 만들기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너무 의식한 점이 보여서 불편하다는 느낌이었죠.

by 금린어 | 2011/02/02 03:28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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